교실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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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이념

내과학은 의학의 기본으로서, 고려대학교 내과학 교실의 목표는

  • 학생, 전공의, 전임의의 각 단계에서 필수적인 의학 지식을 교육하며 의료진으로서 가져야 할 기본 역량과 인성을 함양한다
  • 인류의 건강과 생명의 존중을 기본으로 최상의 진료를 수행 한다.
  • 각 분야의 첨단 치료법과 생명 연구를 통하여 의료의 미래를 연다.
  • 지역사회 더 나가가서 세계의료계에서 리더쉽을 발휘할 수 있는 역량 있고 창의적 인재를 양성한다.

교육이념

내과학 교실은 소화기, 순환기, 호흡기, 신장, 감염, 종양/혈액, 감염, 류마티스 등 8개 세부 전문 분야로 나누어 지며, 95명의 전임교원과 77명의 임상교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의료원 산하 안암, 구로, 안산 병원에서 진료와 의과대학 학생의 교육, 전공의, 전임의의 수련 교육과 진료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최첨단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여명기 및 초기 역사

구한말 및 일제시대의 사립 의학교육기관으로서 미국 감리교회 여 선교사인 로젯타 홀에 의해 1928년 발족한 <조선여자의학 강습소>가 1938년 공식적인 의학교육 기관으로 자리잡은 후 1938년 <경성여자의학 전문학교>로 이어져 현재의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으로 발전하였다. 1938년 경성여의전 발족 시 내과학 교실은 그 당시의 다른 의학교육기관과 마찬가지로 제1내과, 제2내과로 발족하였다. 제1내과에는 이갑수, 제2내과에는 이정복 교수가 있었다. 이갑수 교수는 경성의전을 졸업 후 독일유학을 한 분으로 주로 소화기, 전염병을 강의하였고, 이정복교수는 경성제대 의학부를 졸업 후 부속병원 내과에서 근무하다 부임하여 호흡기학을 강의하였다. 1941년 9월 명륜동에 새 교사가 증축되고 병원이 개원하면서 조교수로는 유병서 선생과 오세헌 선생이 1내과에 합류하였고, 김봉한 선생이 2내과에 계시면서, 진단학을 담당하셨다. 1944년에는 김기호 전임강사가 새로 부임하여 임상 실습 지도를 담당하였으며, 1945년에 생리학교실로 진로를 바꾼 김봉한 선생대신 이종학조교수가 내과에 합류하였다. 당시 경성여자 의학전문학교는 5년제로 구성되어 1년의 예과교육과 4년간의 의학교육이 시행되었고 이중 5년째에는 임상실습 위주로 교육이 진행되었다.

광복 후 서울여자의과대학, 수도의과대학, 우석대학교,

1945년 8월 일본이 물러가고 광복이 되면서 일본인 교수단이 물러가면서, 교수진의 대폭적인 이동이 있었다. 광복 후에 전문학교로 계속되어온 한국의 고등교육기관이 대학으로 개편되면서 1948년 5월 21일 서울여자의과대학으로 승격허가가 나고 당시 내과과장이던 이정복교수가 초대학장을 맡게 되었다. 이때 내과에는 유병서 교수, 황주봉 교수, 김봉한 교수 - 후에 경성대에서 생리학을 전공하고 6.25때 월북 - 등이 있었다. 1949년 제1내과의 이갑수교수가 보건부차관으로 옮겨가면서 경성의전을 졸업한 문종소 교수가 후임으로 부임하여 소화기 분야를 담당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병원은 폐쇄되고 .모든 의과대학생들이 부산에서 함께 교육을 받았으며 이정복교수는 납북되었다. 한국 전쟁 후 제반 설의 복구에 시간이 필요하여 1955년도에야 병원의 기능이 회복되었다. 그 동안 학생 임상실습교육은 수도육군 병원에 위탁교육으로 대신하였다. 내과가 세분화된 분과로서의 형태는 1955년에 고광도 교수와 홍순국교수가 부임하고, 1961년 서순규교수가 합류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한편 학교는 서울여자 의과대학에서 1957년 학교가 남녀공학으로 바뀌면서 수도의과대학으로 교명이 바뀌었다. 1957년 수도의과 대학 발족시의 내과 교원으로는 문종소 교수, 유병서 교수, 홍순국 교수, 고광도 교수가 있었다. 1966년 수도의대에서 우석대학교로 교명이 바뀌고, 우석대학의 재정적 어려움으로 인해 1971년에 의과대학이 고려대학교에 합병되었다. 이때 소화기 내과는 고광도 교수가, 흉곽 내과는 서순규 교수와 송희승 교수 (1969년 부임)가 일반내과를 홍순국교수가 맡아서 3내과 체제로 내과교실의 발전을 이끌었다.

고려대학교 시대

재정적 어려움을 겪던 우석대학교 및 부속별성 의료기관이 1971년 12월 고려대학교에 합병되어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이 되었다. 이때의 내과교실은 이전의 소화기, 흉곽내과 일반내과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고려 대학교 합병 이후 교수요원으로 현진해교수(1972년), 노영무교수(1976년), 서동진교수(1977), 유세화교수(1979년), 박정의교수(1978에 부임, 1982년부터 근무), 김종극 교수(1978,2001년 교통사고로 작고) 가 부임되었다. 내과의 교수요원이 증가하고 내용이 방대하며 보다 세분화 되는 경향에 따라, 소화기, 흉곽 일반 내과가 아닌 전체 내과학을 통합하고 전체 내과학 안에 분과형식 분류를 할 필요가 있게 되었다. 따라서 1981년 내과를 통합하고 1,2,3 내과의 명칭을 쓰게 되었다. 내과학 교실 통합 당시의 교실원은 제 1 내과에 현진해교수, 김종국 전임강사, 서동진 전임강사 제 2내과에 서순규교수, 노영무 조교수, 유세화 전임강사, 박정의 전임강사 그리고 제 3 내과에 홍순국교수가 있었다.
고려대학교 의과 대학병원이 확장되고 1983년 구로 병원과 1984년 여주병원, 1985년 반월병원 (후에 안산병원으로 개칭)이 설립되며 교수요원의 수가 급격히 증가되었다. 1983년 7월 고려대학교 병원이 의료원 편제로 승격 개편되었고, 1992년부터는 내과의 분과가 행정적으로 독립하면서 제1내과에서 소화기분과가, 제2내과에서 순환기분과와 호흡기분과가, 제3내과에서 신장분과, 내분비분과와 감염분과가 새로 발족하여 독립적인 진료 및 교육 연구활동을 시작하였다. 후에 혈액종양분과, 류마티스분과가 추가로 개설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구로병원, 안산병원도 세부전공별로 분과가 분화 독립되면서 비슷한 과정을 밟고 있다. 세 병원의 전임 교수요원도 지속적으로 보강되어 2015년 3월 현재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에 93 명의 내과 교수가 세 병원에 나뉘어서 근무하고 있다. (안암 33명, 구로37명, 안산 22명) 세 병원으로 나누어져 있으나, 내과학교실은 통일된 체제를 갖추어 정기적인 전체 교수회의와 주요 학사문제에 대한 3개 병원 내과과장 및 의국장회의, 내과인사위원회, 교육위원회, 실습담당 교수회의 등 주요 분야의 담당 교수회의를 통하여 전체적인 교수의 의견을 수렴하고 내과의 종합적인 발전을 도모하고 있다.
내과가 통합되면서 주임교수제가 도입되어 1981 년부터 홍순국 교수(1981-1985), 서순규 교수(1985-1987), 현진해 교수(1987-1992), 박승철 교수 (1992-1994), 이창홍 교수(구로, 1994-1996), 노영무 교수(1996-2002), 유세화 교수(2002-2006), 최동섭 교수(2006-2008), 유호상교수 (2008-2010), 김형규 교수(2010-2012), 김창덕 교수(2012-2014), 심완주(2014-) 가 주임교수로 활동하였으며 주로 교원 인사와 학사관련 업무를 보았다.
전공의 교육에 관한 변화도 많았다. 1981년 통합내과가 생기기 전까지는, 인턴 시작 할 때부터 소화기, 흉곽 일반 내과로 소속 내과를 정하고 전공의 수련을 시작하였다. 연차별 1명 내지 2명의 전공의 (총3-4명)가 로테이션이 없이 소화기내과, 흉곽내과, 일반내과에서 4년간 전공의 생활을 하였다. 당시 세 내과끼리의 선의의 경쟁도 대단하였다는 이야기가 내려오고 있다. 1979년부터는 세 과 사이에서 전공의를 파견하는 형태로 로테이션이 시작하여, 1981년부터는 내과 전체로 전공의를 선발하여 1,2,3 내과를 고루 돌게 하였다. 구로병원과 안산병원이 개원 후에는 이전보다 전공의 숫자는 늘어 연차별로 전체 12-15명이었다. 2005년 이후에는 전공의 숫자가 20명이상으로 증가 되었다. 전공의의 수련관련 업무는 주로 안암, 구로, 안산의 각 통합 내과 과장이 주관하였으며 전공의 선발은 병원별로 하였지만, 전공의의 로테이션이 평등하게 이루어져서 전공의들의 병원 소속은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그러나 구로와 안산 병원의 병상 수가 늘고, 세 병원이 모두 삼차 병원으로 됨에 따라, 2011년부터 점차 본인이 속한 병원 내과에서 더 장기간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형태로 수련교육형태가 바뀌게 되었다.